정치는 탕평론 및 세도정치의 전개라는 특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물론 18세기 탕평론이 제시된 데에는 일정한 배경이 있었고, 영조대에 전개된 수론탕평론의 입장과 정조대에 시행되었던 준론탕평론(의리의 변발을 보다 중요시하지만, 붕당의 타파 역시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긍정하는 견해이다.)은
탕평책은 왕권 강화를 통해 노론과 소론을 견제하며 군제.경제 개혁을 이루고, 탕평파를 육성하는 등 정권 안정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탕평의 원리에 의해 노론과 소론이 공존해 있었으나, 강력한 왕권에 의한 정쟁의 억제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가졌다. 토역 경과 사건과 나주 괘서사건 등의 이후 소론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잠재적으로 성장하여 16세기 중엽에는 마침내 집권에 성공한다.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들은 훈척 세력을 정계에서 배제하는 한편, 국왕까지도 제어하며 정치를 주도하고자 했다. 그들은 집권의 당위성을 붕당정치론에서 찾고자 하였다. 사림들은 붕당의 개념과 당위성
탕평론 : 당 불문, 현명한 인재 등용 주장
숙종 : 탕평교서 반포, 갑술환국 후 정국 안정 추구 [BUT. 실제 탕평은 영조대부터]
병신처분 : 윤증 VS 송시열 (회니시비)
➡노론 VS 소론 ➡노론 두둔
➡노론 전제정치의 서막
경신환국 이후 남인에 대한 처분을 두고 강경론(노론)과 온건
정치사의 중심인 탕평책에 대하여 그것의 본질과 성격 등을 규명하고 나아가 이를 토대로 18세기 정치사에 대해 이해하고자 한다.
Ⅱ. 붕당정치의 과정
(별도로 첨부된 붕당의 계보와 같이 봐주세요^-^)
붕당의 효시라 할 동인과 서인의 분열은 김효원과 심의겸의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벌인 대
I. 훈구세력과 사림
1. 서론
16세기 사림정치가 시작되며 붕당정치가 판을 이루기 전에는 공신들과 왕족의 친인척들로 이루어진 이른바 훈구세력이 득세를 하였다. 훈구세력의 특징은, 초기에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지으며 왕권강화에 도움을 주었고 중앙집권적 성격이지만 갈수록 권세가 심해져 점
사림파는 훈구파라는 강력한 상대세력이 있을 때는 단결되었다. 그러나 선조조에 훈구세력이 무너지고 사림세력이 정권을 차지하자 사림이 자체 분열하여 붕당이 생기고 붕당간에 당쟁이 치열해졌다. 그러므로 당쟁은 사림정치의 부산물로 보아야 한다. 당쟁이 유독 조선후기에만 있었던 것도 그러한
제 1 절 노ž소론의 갈등과 괘서사건
1. 탕평책의 추진과 노ž소의 갈등
이 단원에서는 영조가 탕평책을 추진하게 된 시대적 배경에 대해 서술하고 있으며, 이를 숙지하여 당시 정국의 흐름을 읽음으로서, 영조대의 괘서사건이 갖는 정치적, 사회적 성격과 의미에 대해서 보다 분명하게 파악할
1. 근현대 민족ㆍ민주운동과 호남의 위상
1-1. 일제 강점기 호남에서의 민중운동
정순제,「호남종횡관(湖南縱橫觀)」: “전남은 과거 갑오운동과 현금의 농민운동의 진원지로서 무산의 소작인들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부터 약자의 무기는 오직 단결뿐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면 단위로 노동단체를